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 (문단 편집) === 열악한 보급 === 게다가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보급]]도 어려워, 장병들의 생활마저 매우 열악하였다. 아무리 [[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아들에게 본토에서 구운 [[초콜릿 케이크]]까지 수송해주는 [[미군]]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유럽에서 자체 보급도 어느 정도 되고 있었기에 미군의 여유로운 보급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럽이었다면 점령한 도시에서, 하다못해 [[중동]]이라 해도 곳곳에 소도시와 마을이 있으니 정 안 되면 징발이라도 할 수 있다. 대테러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ㆍ[[이라크 전쟁]]에서 미군도 본격 주둔 이전까지는 보급이 고속 진군하는 부대를 따라가지 못해서 현지인 마을에서 이렇게 징발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물론 돈을 주고 구입했다. 대가 없는 징발은 강제징발이 아닌 그냥 약탈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빵 한 조각, 휴지 한 장조차 전부 보급선에만 의지해야 했던 전장이었다. [[과달카날 전투]]가 양군이 모두 극도로 열악한 보급 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대표적인 전장이다. [[아마존]] 오지나 다름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 섬에 보급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원주민을 약탈했다가는 협조를 받을 수 없었기에[* 이런 동네에서 원주민과 척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일본군]]이 [[우생학]]에 빠져 이러한 관계를 등한시했기에 [[미군]]이 '적당한 원조+일본군으로부터 보호'만 약속해도 원주민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고, 덕분에 [[미 육군]]과 [[미 해병대]]는 [[일본 육군]]에 비해 정보력에서 항상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결국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평양 전구에서 [[미군]]이 체험한 보급 난이도는 아주 [[헬게이트]]였다.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장기간 지속적인 보급 계획 수립이 필수적이었고, [[보급부대]]의 규모도 유럽 전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방대하고 컸으며, 보통의 문명사회에서 쉽게 징발 가능했을 가장 기초적인 소모품 물자까지 보급에 의존해야 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조달한 물품들도 있었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게다가 1942~1943년 등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 비해 지원 규모상으로 크게 나을 게 없었고, [[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꺾기까지는 항상 수세에 있었으므로 [[일본 해군]]에 의해 수송선단의 보급계획에는 항상 차질이 발생했다. 특히 [[과달카날 전투]]의 해병대는 외부 화력지원까지도 일본군 우세였으니, 결국 감투 정신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싸움 상대인 일본군, 협력 상대인 원주민은 문화권도 완전히 달랐다. 이렇다보니 전쟁 초에는 [[동남아시아]] 일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들이 주요 전장이라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지원을 받았는데도 유럽과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미군 장병들도 보급품 부족으로 심한 고생을 하고, 때때로는 진짜 [[정신력]]에 의존해야 했다. [[과달카날 전투]] 초기 [[미 해병대]]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비행장을 짓고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등 정신력으로 버텼다. 애초에 육군보다 보급 순위도 밀려서 개전 초에는 사용하는 제식 소총부터 일본군 99식 제식 소총과 별로 다를 거 없는 [[스프링필드]]였고, 보급 사정이 나빠지면 식량 보급이 안 되어서 일본군이 패주할 때 남기고 간 [[쌀]]과 [[간장]] 같은 생소한 식재료만 가지고 상당 기간 배식을 해야 했어서, 타군에 비해 굶주림이 일상일 지경이었다. 그렇다보니 일부 해병대 병사들이 기회가 되면 육군 보급품을 훔치는 경우가 상당 부분 존재하였고, 이로 인해 군사법정에서 처벌받은 기록도 존재한다. [* 실제로 [[더 퍼시픽]]에서 이러한 기록들을 기반으로, [[과달카날]] 섬에 [[미 육군]]이 상륙하자 [[미 해병대]] 병사와 간부들이 미 육군의 보급품을 약탈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쟁 중반 이후 보급선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일본군]]의 경우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미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개구리 뜀뛰기 작전'에 의해 건너뛴 섬에 남겨져서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일본군들은 실제로 식량확보를 위해 '''[[둔전]]''', [[사냥]] 및 [[낚시]]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나마 [[라바울 본영]]처럼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한 곳도 있긴 있었다. '개구리 뜀뛰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 일본의 최정예 비행대였던 '타이난 항공대'도 이곳에 본거지를 오래 두었으며, 최대 20만 명 이상의 육/해군 정예 병력을 배치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남태평양 최대 전략거점이었다. 병력이 워낙 많아 우회를 결정했으며, 종전 후 이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라바울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부건빌 전역]]처럼[* [[호주군]]이 섬의 중앙 부분만 차지한 채 대치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전 병력의 1/3 이상이 '''아사한''' 곳도 존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